13th Jan2003

전 국민대상 법 집행교과서 “로 앤 오더”

by worrynet

어린애가 울면 호랑이가 온다고 한 마디 해 준다. 그래도 계속 울면? 곶감을 준다. 애가 뚝 그친다. 사람들의 생활방식엔 기묘한 절차가 존재하고, 그 절차는 쌓이고 쌓여 규칙이 되고, 법이 된다. 외부에서 보는 절차는 때로 불합리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부의 시선에서 볼 때 그 절차는 수많은 세월 속에서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추며 자라온, 그리고 또한 바뀌기 힘들도록 견고해진 결과물이다.

올해 미국에서 13년차를 맞는 시리즈 <로 앤 오더 (Law and Order)>는 형사물이자 법정물이다. 보통 드라마가 체포 과정까지나 재판 과정만을 보여주는 편인데, <로 앤 오더>는 반반씩 나눠 반은 수사 및 체포과정, 나머지 반은 재판 과정에 할애한다. 놀라운 일이다. 체포한 사람들은 판결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냥 체포만 할 뿐, 이들을 기소해서 벌을 받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다. 기소하는 사람들은 체포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일을 재구성한다.

주연 배우들이 드라마 주연이면서도 반만 나오니 참으로 편하겠다, 라는 생각도 들지만. 드라마를 이렇게 반을 나눠주는 효과는 매우 유익하다. 한쪽에만 치우치다보면 실제로는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줄긋기가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 어떤 증거를 확보해야 혐의자를 구속할 수 있고, 구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증거가 재판에서 판결까지 이끌어 낼 수 있는가. 그 정황을 다 보여줌으로서 실제 법 적용을 한꺼번에 ‘꿸’ 수 있다. 실제 적용가능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보면서 배우는 게 많게 느껴진다.

<로 앤 오더>를 관통하는 것은 철저함이다. 냉정할 정도의 사고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 <로 앤 오더>의 사실감 넘치는 미덕 중 하나는, 재연 없이 오직 말로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카메라도 마치 옆에서 다큐멘타리를 기록하듯이 쩔꺽 붙어서 사고 당시의 정황을 말하는 사람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재연 장면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서술하는 사건 정황은 단지 목격자의 주관적 진술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형사가 심문을 하건, 검사가 심문을 하건, 막다른 골목에서도 아주 작은 단서 하나가 범인을 체포하거나 판결을 내리게 한다. 수많은 시점에서 바라보는 증언과 증언. 이것을 절차를 거쳐 객관적 판단 근거로 만드는 것이다. 혐의자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전반부, 법으로 유죄를 받느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후반부 모두 냉정한 현실 속에서 사건을 판단하게 하고, <로 앤 오더>는 인간상을 바라보는 감동보다는 현실의 한 단면을 다시금 깨우치는 각성을 선사한다.

<로 앤 오더>에 체포 과정이 나오기는 하지만 긴장감 넘치는 추격장면이나 흥미진진한 액션 등은 없다. 하다못해 혐의자를 좁혀서 체포 직전까지 와도 두근두근하는 재미는 없다. 그냥 저렇게 잡는구나, 하는 느낌만 들뿐이다. ‘CSI 효과’ – 범인체포과정에 극도의 낭만성을 부가, 철저한 법적 절차 자체를 속도감 있고 스릴넘치는 카타르시스로 만드는 방식을 쓰지 않는다. 다큐멘타리식 카메라 움직임이나 편집 등은 외려 이를 피해가기까지 한다.

그러나 총을 난사하지 않을 뿐 <로 앤 오더>는 상당한 폭력 과다의 드라마다. 정치가 피흘리지 않는 전쟁이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로 앤 오더> 전체는 액션 없는 폭력이나 다름없다. 서로 주먹이나 무기로 치고받지는 않지만 사건 자체가 피해자 개개인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냉정하게 파헤치기 때문이다. 범죄는 피를 보기 때문에 잔인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인격을 파괴하고 몸과 마음 모두를 피폐화하기 때문에 잔인한 것이다. <보스턴 저스티스>가 현실의 폭력성과 불합리성 앞에 아예 정의실현을 포기했다면, <로 앤 오더>는 그래도 이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현실에 굴하지 않고 복잡한 절차 안에서라도 최대한 정의실현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로 앤 오더>를 좀 더 사실적으로 만드는 요소. 뜻밖에도 ‘남자들의 수다’이다. 브리스코 형사를 위시한 넥타이부대 형사들의 스포츠신문 스타일 유머는 드라마의 긴장을 가끔 풀어주는, 남성적 유머의 절정이다. 이 드라마는 기가막힐 정도로 여자와 유색인종이 없다. 법 집행단계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백인 남자들의 세계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보여준다. 그래도 시즌 13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면서 유색인 및 여자 출연진이 좀 보강이 된 편이기는 하고, 현재 MGM에서 방영하고 있는 분량에도 검사 보조에 여자가 있다. 하지만 <로 앤 오더>의 강한 남성성과 조용한 폭력성은. 여자와 유색인은 드라마 상의 장식(으로 보기엔 유능하지만)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워주지는 않는다. 드라마가 어찌나 현실적이고 철저한지 여성 및 유색인 부족현상까지도 현실의 일부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놀라운 일이다.

Share on Tumblr

Off

Comments are closed.

Switch to our mobile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