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th Sep2002

안녕! 세기말의 아이콘이여 “X파일”

by worrynet
옛날이 아닌 현재, 미국의 연방수사국 지하실에는 외계인과 돌연변이, UFO를 쫓는 부서가 있고, 이들은 외부에 좀처럼 새어나가지 않는 기밀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 부서에는 기이한 현상을 잘 믿는 요원과 잘 믿지 않는 요원 둘이서 늘 툭탁대면서 아직도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엑스파일 (The X-Files)>은 확실히 <전설의 고향>같은 괴기성 드라마로서 시작했다. 들으면 코웃음칠 내용. 외계인, 돌연변이, 귀신, 주술. 그러나 엑스파일 사건들은 황당한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있을 법했다. 비현실적, 혹은 의사과학적인 내용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두 FBI의 모험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인식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지금이야 상상이 안 가지만 처음 나올 당시, 박봉에 걸맞은 조촐한 옷차림과 외모에서 그다지 튀지 않는 두 수사관의 모습은 리얼리티 그 자체였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나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주인공이라고 믿을 수 없는 요원들이 수사하는 상황 상황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사건진행은 제대로 된 설명도 불가능한데다가 심지어 사건 결말을 흐리거나 폐기하기까지 했다. 시청자들은 화면과 대사 군데군데에 포진해 있는 암시를 통해서 정보를 얻어야 했고, 심지어 해석까지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 해석을 하기 위해 인터넷과 PC 통신으로 모여들었고, 한 드라마 아래 모인 TV 시청자들의 움직임은 한 시대를 표방할만한 힘을 갖게 되었다.

드라마 <엑스파일>은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필연적 기적이다. 컬트는 말 그대로 컬트일 때는 살아남지 못하고 단명하는 법이다. 주류가 컬트라고 인식할 정도의 일정 규모가 모여야하고, 지속적이어야 했다. 그리고 작품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훌륭한 제작진과 배우가 있어야 했다. 엑스파일은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세상의 조류를 파악할 줄 아는 훌륭한 작가진, 뜻이 맞는 제작진, 훈련된 감독진, 능숙한 배우진, 그리고 이들을 알아볼 안목을 갖춘 팬, 이 팬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성숙한 사회.

‘담배피우는 남자’ 역의 윌리엄 데이비스는 <엑스파일>을 가리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패턴이 바뀌는 순간에 존재하면서 양쪽을 만족시키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엑스파일의 다스베이더에 걸맞는 명쾌한 분석력이다. 인터넷 세대는 인쇄매체라는 ‘권위적이고 일방통행적인 매체’와 인터넷이라는 ‘근거는 부족해도 개방적인 매체’ 모두에 익숙한 존재였다. 일반적 지식을 거스르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권위성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세대였다. 근거부족이라 주장해도 진실은 은폐할 수 없고 존재한다.

그러나 진실의 존재의의에 비해 주인공이라고 하는 멀더와 스컬리는 죽도록 고생을 하고서도 얻는 것은 없고 상처투성이로 남겨진다. 팬들은 주인공들의 댓가없는 진리추구에 현대인의 절망감이란 면에서 공감을 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는 혹은 존재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허구라고 생각하고 도외시해도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위협한다고 해서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 존재, 멀더와 스컬리 자체가 진리를 향한 빛이 되었다.

<엑스파일>이 놀라운 점은, 시대를 반영하고 소화했을 뿐더러, 그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색깔을 유지할 방법을 알았다는 점이다. 90년대 초반까지도 TV 시리즈는 좀 유치해도 되는 종류였다. 아무리 뛰어나봤자 TV 시리즈였으며, 즐기는 사람들조차 저급하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엑스파일>은 그 암묵성을 깨 버렸다. TV는 영화보다 못할 이유가 없었다. TV 시청자들은 일회성이 아닌 정기적인 지적유희를, 탐구심을 넘어선 숭배대상을 만나게 되었다. 초기에 <엑스파일>이 불러일으킨 ‘그거냐 아니냐’의 논쟁은 녹록치가 않았다. 깊이를 요구했다. TV 주제에 지성과 과학을 요구했다. 초반부터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의사과학 혹은 자연과학적인 해석을 동원해야 했다. 또한 <엑스파일>이 외적으로 보여주는 현상 – 컬트적 인기, 90년대 반영 등의 사회과학적 논쟁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적 설명이나 초자연에 대한 지식은 점점 ‘엑스파일이니까 그렇지’의 관습으로 굳어가면서 논쟁도 바닥이 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엑스파일>에게는 예상치 못하던 면이 있었다. <엑스파일>은 한마디로, 드라마의 작품성이 너무나 뛰어났다. 그냥 TV이기를 거부했다. 주류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TV계의 아카데미, 에미상도 TV계의 이단아 <엑스파일>의 작품성만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엑스파일>은 세 번째 시즌에서 에미상을, 네 번째 시즌에서 골든글로브를 수상함으로서 드라마적 실력을 인정받았다. 여느 영화도 못 따라갈 자기반영적인 에피소드를 내놓는가 하면, 어떤 안건에 대해서 정치적 해석을 열어놓고, 치밀한 인간상의 모습을 드라마 안에 녹여놓는 솜씨는 천의무봉이었다. 그렇게 되어 <엑스파일>을 둘러싼 토론은 끝나지 않고 드라마 자체를 해석하는 ‘인문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엑스파일>은 다른 TV 시리즈와 유달리 차별성이 있었다. 드라마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제작 단계에서부터 남달랐다. 일반적으로 미국 TV 시리즈 제작체계는 매 편마다 제작 관여자가 다 다를 만큼 느슨한 반면, <엑스파일>은 집약적이고 가족적일 정도의 협력체제를 유지했다. ‘참여하면 영광과 보람, 그 대신 개고생’. 장소섭외자 일트 존스의 명언이다. <엑스파일>의 제작자 크리스 카터가 첫 시즌부터 극장용 영화에서만 활약하던 특수촬영 전문가 맷 벡을 삼고초려로 영입시켰다는 뒷이야기는 완성도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려준다.

그러나 <엑스파일>도 드라마였고, 그 한계가 결국은 5년이 넘자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이, 위기를 가져온 것은 결국은 드라마적 속성이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허풍이 쌓여 사실성을 잃어간다. <엑스파일>은 진실 즉 정보를 누가 소유하느냐는 파워 게임의 재미를 쌓아가면서, 정작 ‘진실’은 공허한 말장난이 되어버렸다. 9년을 지내오면서 <엑스파일>은 수많은 변화 혹은 몰락을 겪어왔지만, 마침내 주연 배우가 드라마를 포기하고 나가버리자 이야기가 주체를 못할 정도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새로 투입한 주인공들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도겟의 강직함과 레이어스의 애매모호한 성격은 멀더 스컬리의 단순 변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새 주인공을 띄워주기 위해 남아있는 이전 주인공 스컬리의 역할을 왜곡한 것이 문제였다. 스컬리는 멀더의 아이를 임신했고, 호르몬 변화 탓인지 지난 7년간 보여주었던 성격을 버리고 남에게 짐만 되는 여자인물로 전락해버렸다. <엑스파일>이 이루어낸 업적 중 하나, ‘남자 주인공과 대등한 여자 주인공’인 스컬리를 망가뜨린 것은 정말로 같은 제작진이 저지른 짓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스컬리는 단지 딴지 거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동등한 여자 파트너였다. 멀더가 없자 짝퉁 멀더 행세를 하는 스컬리는 실수 중의 대실수였다.

아무리 스컬리 역의 질리안 앤더슨이 뛰어난 연기자라고 해도 엉망이 되어버린 대본을 상쇄할 수는 없었다. 도겟 역의 로버트 패트릭과 레이어스 역의 애너베스 기쉬가 아무리 앙상블 연기를 이룬다고 해도 스컬리가 그 모양이면 소용이 없다. 여러 가지 신빙성 있는 인터뷰를 보면 도겟과 레이어스 체제를 출범시킬 때만 해도 시즌 11 내지는 12까지도 염두에 두었지만 결국 시즌 9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멀더의 퇴장보다도 스컬리의 변질이 <엑스파일> 자체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망가진 스컬리, 쇠락한 시청률 이외의 또다른 엑스파일의 ‘망조’가 등장했다. 시대가 변한 것이었다. 이제 세기말을 넘어 2000년대 미국은 보수주의 시대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인 분위기는 바뀌어버렸다. 특히나 2001년에 일어난 911 사태는 미국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꿇으라면 꿇어야 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엑스파일>이 ‘멜로물’로 변했다고 해도, 여전히 기본적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절망을 기반으로 하는 드라마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1013 제작진이 911 테러 반년 전에 발표했던 <엑스파일>의 스핀오프 드라마 <론건맨>에는 증인을 없애기 위해 증인이 타고 있는 비행기의 항법유도장치를 해킹, 세계 무역센터에 박아버리려고 한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이 정도의 제작진이 2002년의 보수주의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드라마의 시대는 이제 끝난 것이다. <엑스파일>이란 한 우산 아래 모여서 즐길 수 있었던, 좋았던 시절은 가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엑스파일>의 종영은 묘한 아쉬움과 허전함과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내 인생을 돌아볼 때, 내 인생에 변화를 준 요소는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마음에 품고 싶을 만큼의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순간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나는 자신있게, <엑스파일>이 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아이콘이며 내 인생을 바꿔준 터닝 포인트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엑스파일과 동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라 생각한다. 9년간의 수많은 배신 혹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닫아야 할 때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아쉽다. ‘시들기 전에 장미꽃을 모아라’라는 로버트 헤릭의 시가 실감이 나고, ‘엘비스의 영혼을 만날 수 있는 멤피스를 걷는 것이 꿈만 같다’는 셰어의 노래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9년간의 짧고도 긴 세월을 마무리한다. 꼭 끝을 보아야만 할까? 끝은 있는 법이고, 지금이 그때인 것은 틀림없다. 이 드라마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전의 영광을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9년간의 대장정에, 내 인생의 한 이정표에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고마워요, 엑스파일.

27th Sep2002

9ABX18 sunshine days 염력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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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crap.”

Off
07th Sep2002

[한겨레21] 섹스 앤 시티 – 그들처럼 유쾌하게!

by worrynet

그들처럼 유쾌하게!
여성이 느끼는 ‘색스 앤 시티

케이블TV 출범 이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자신을 아줌마로 규정하는 주부 대상 홈쇼핑, 직장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명품 및 해외관광 소개, 그리고 직장에 다니지 않는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이 속속 등장했다. 이 가운데 세 번째- 대낮에도 TV를 볼 수 있는 젊은 여성층을 겨냥한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성공한 것은 케이블TV 초기의 도시 남녀를 다루는 시트콤이었다. HBS의 <내 사랑 캐롤라인>, GTV의 <엘렌>, 동아TV의 <프렌즈> 인기는 젊은 여성들이 그동안 얼마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에 굶주려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낮 TV 시청이 가능한 젊은 여성’들이 선호한 도시 시트콤은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주인공들 자체가 학생보다는 많은 나이,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초년생이라는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상당수 캐릭터가 회사원보다는 프리랜서나 자영업이라는 독자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특이하다. 그리고 웃음을 무기로 해서 스트레스 해소제 역할을 전담하는 것도 비슷했다.

<내 사랑 캐롤라인>과 <엘렌>이 인기도 문제와 케이블TV 자체의 구조조정 틈바구니에서 탈락하고, 남은 것은 <프렌즈>였다. <프렌즈>는 여성채널 동아TV의 간판 프로그램이 되었으며, 도시의 젊은 남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지상파 도움 없이 성공한 시트콤으로서- 본의 아니게 지상파 방송국에 저질 표절 시트콤을 난무하게 한 견본이 되었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프렌즈>의 성공이 HBO에서 <섹스 앤 시티>를 야심작으로 내놓게 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섹스 앤 시티>가 대담한 성을 무기로 삼는다지만 기본은 역시 대도시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기 때문이다.

제목만큼이나 적나라하다고 소문난 드라마 <섹스 앤 시티>. 최대 무기는 역시 솔직함이다. 뉴욕 독신 여성 네명이 즐기는 애정사 이야기. 그리고 그에 딸려나오는 ‘처녀들의 식탁 수다’, 여성들끼리 모였을 때 나오는 통렬함과 빈정거림이다. 여성들이 주가 되는 성인물이라는 점에서 여성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다. 자기네가 세상을 지배하는 줄도 모르고 지배하느라 스트레스받는 남성들에게 옆구리 콱 쏴붙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설사 지나치게 적나라한 것이 싫다고 해도, <섹스 앤 시티>의 주인공들이 남녀 관계에 대해 쏟아붓는 신랄한 독설에는 깔깔대며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독설은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 독설은 기껏해야 분풀이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주부나, 막다른 골목에 놓인 ‘악녀’의 신세한탄에 지나지 않는다. 화풀이로 나오는 독설은 단지 일회용일 뿐, 상황이 끝나면 독설의 힘도 없어진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라는 영화가 결국 남성 영화에 지나지 않는 것도 그 여성들의 성적 관심이 자연스러움의 발로가 아니라 사회적 억압의 결과물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섹스 앤 시티>의 독설은 생활 자체에서 나온다. 여성들이 피해의식이 아닌 자기애를 발휘하면 능히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뇌 속에, 피부 아래 묻혀 있지만 슬쩍 긁어주면 ‘아하!’하고 튀어나올 생각을 마구 뿌려준다. 정말로 때 미는 것처럼 시원하기 그지없다. 1년 전에 젊은 여성이 <나는 미소년이 좋다>를 내자 “망측해!”라는 반응이 먼저 튀어나왔다는 것을 몇명이나 기억할까? 지금은 축구선수들을 ‘꽃미남’으로 포장 못해서 모든 스포츠 신문이 안달이다. 딱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쾌감은 처음엔 민망함, 다음엔 자연스러운 유쾌함이다.

무엇보다 <섹스 앤 시티>는 진짜 여성들의 세밀한 면을 꿰고 있다. 진짜 친한 여성들이 서로를 야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 정말 친구가 맞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서로 “썩을년, 망할년” 하며 싸가지 파이어볼에 피박 슬레이브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그 밑에 또는 그 이후에 보여주는 유대감과 교류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섹스 앤 시티>는 여성들의 동감대를 확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드라마적 능력. <섹스 앤 시티>는 아주 적극적으로 여성들의 환상을 채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먼저 뉴욕이라는 배경부터 환상을 채우기에 적격이다. ‘뉴욕애들은 저러고 산다며?’ 하는 부러움에다 주인공들이 걸치는 ‘명품’은 상당수 젊은 여성들을 유인하기에 충분하다. <섹스 앤 시티>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회사일에 찌든 젊은 여성들이 바라는 상황이나 기대치를 정확하게 꿰뚫어본다. 젊음을 더 소진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라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 금전과 재력이 있는 만큼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마음껏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프리랜서로서, 캐리가 겨우 그 정도 칼럼을 쓰고 그런 명품을 두르고 다닐 만큼의 돈을 번다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생각할뿐더러- 또한 양심불량이라고 생각한다(히히히, 반만 농담이다).

남명희/ 자유기고가

Off
06th Sep2002

9ABX17 william 안녕 윌리엄

by worrynet

Jump the hills

The Breather asked Scully to hold William for Mulder.

Baby William didn’t scare him.

But baby William looked up somewhere.

The Truth is : Hey, William! Have you ever seen Mr. Potato Head? He looks like this.

02nd Sep2002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밀레니엄”

by worrynet

컬트의 정의를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소수만이 체험하고 같이 공유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했을 때, <밀레니엄 (Millennium)>은 정말로 컬트이다. <엑스파일>이 컬트를 걸쳐 주류로 상승한 데 반해, <밀레니엄>은 결국 주류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시리즈가 종영되었다. 그 점까지도 <밀레니엄>은 철저히 컬트로서 남을 수 있었다.

<엑스파일>의 제작자 크리스 카터가 야심적으로 만든 시리즈 <밀레니엄>은 말 그대로 세기말적인 암울함을 담고 있는 드라마이다. FBI인 프랭크 블랙은 범죄자의 환상이 머릿속에 보이게 되자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사표를 던져버린다. 그러자 범죄자문위원단인 ‘밀레니엄 그룹’은 프랭크에게 접근해서 이 능력을 범죄심리학에 쓰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밀레니엄 그룹에 가담하게 된 프랭크는 같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점점 밀레니엄 그룹이 세상을 주도하는 비밀결사 엘리트 집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고, 갈등을 일으킨다.

<밀레니엄>은 연쇄살인사건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 사건을 둘러싸는 인간의 본성과 선악에 대해 치밀하게 그물을 짜 나간다. 영능력이 있는 범죄심리학자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에서 <프로파일러 (The Profiler)>와 발상면에서는 똑같다. 하지만 <밀레니엄>은 연쇄살인이나 추리보다도 인간의 선악, 인간의 진리 추구에 대해 질문하며 시청자를 도망칠 수 없게 선과 악의 기로에서 패닉상태로 몰아넣는다.

<밀레니엄>은 시즌에 따라 드라마 성격이 널뛰기를 하는 편이다. 크리스 카터가 주도한 시즌 1은 주로 프랭크 블랙을 중심으로 연쇄살인마 사건과 인간의 사회적 타락과 구원을 다뤘다. 영화 <데스티네이션>으로 이름을 날린 글렌 모간, 제임스 웡 콤비가 지휘를 맡은 시즌 2는 밀레니엄 그룹을 사이비 종교단체로 만들었다는 원성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시즌으로 손꼽힌다. 프랭크처럼 영능력이 있는 라라 민스, 초월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피터 와츠, 현실 안에서 행복과 인간됨을 고민하는 캐서린. 여러 인물들을 다각도에서 부각하며 충돌하게 함으로서 단순히 범인을 통해 인간의 선악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범인을 쫓는 주인공들의 심적 여행을 통해서 인간의 선악, 초월을 다룬다. TV 시리즈에서 이런 깊은 주제를 다뤄보았자 얼마나 다루겠는가, 하는 걱정은 오만으로 밝혀진다. 진지한 드라마에서 코메디까지, 장르불문 모든 에피소드가 영적 고양현상을 일으킨다. 시즌 3은 시즌 1과 2에서 작가로 활동하던 칩 조한슨이 담당했는데, 객관적으로도 완성도가 떨어졌고, 시즌 2에서 벌려놓은 일을 너무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중반 이후에 다시 어느 정도의 파워를 회복했는데도 결국 회생불능 판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엑스파일> 레이어스와 폴머의 전신으로 보이는, 시즌 3에 등장한 엠마 홀리스와 베리 볼드윈도 상당히 좋은 캐릭터였음에도 드라마 초반의 어리버리함이 인물까지 깎아버릴 정도였다.

<밀레니엄>은 연쇄살인의 끔찍함이나 수사과정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가’ ‘이런 상황에도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왜 살인마들은 이런 강박관념에 시달리는가? 강박관념의 이면 뒤에는 정말로 초월적인 선과 악의 투쟁이 있는 것인가?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 그리고 타락의 끝에서 인간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가. 인간의 존재라는 질문은, 특히나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 자체를 절망으로 빠뜨리기 마련이다. 절망으로 끝나기 십상인 질문이 공허한 넋두리가 되지 않는 것은 죄의식에 면죄부를 발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이상, 책임이 뒤따른다. 그 책임을 통감하고 받아들여야만 초월이 뒤따른다.

초월의 존재에 대해 추구하는 인간을 그리면서도 거대한 존재 앞의 먼지가 아니라 끝없는 추진력을 지닌 생명체로 묘사하는 <밀레니엄>의 정서적 충격은 전대미문이다. <엑스파일>은 우리 인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계에 서 있다. 그 경계선에서 선을 넘을 것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일반 상식선만 안 넘어가고 자기 혼자 문을 닫아걸면 차라리 다 잊을 수 있다. 그러나 <밀레니엄>은 도피가 불가능하다. 현실이고, 평범함 안에 인간의 악이 도사리고, 바로 내 옆의 사람이 언제든지 악인으로 드러날 수 있다. 외계인은 저 너머에라도 있는데 연쇄살인범은 바로 옆집에 있는 것이다. <밀레니엄>은 단순한 전세계의 멸망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세상도 바로 붕괴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가능성을 건드려 놓기에 진정한 말세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세기말적 정서를 표현하는, 가슴을 저미는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인간의 존재를 다시금 영적으로 고양시키는 이 시리즈는 현재 시즌 3을 만날 수 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영광과 절망과 초월의 시즌 1과 2를 함께 보게 될 날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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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st Sep2002

[wallpaper] 추석기념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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