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엑스파일이 90년대에 이룬 성취

  •  어디에 내려다가 퇴짜 맞아서 ㅎ 엑스파일 시즌 10이 오씨엔에서 방송되니 여기 올립니다.  7월 21일 밤 12시!!!! 목요일 밤 12시(금요일 밤 0시)에 방송됩니다.

 

1990년대, TV 드라마의 르네상스

1980년대 이전의 ‘TV 드라마’는 영화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 싸구려인 제작환경에서 보여주는 조잡한 이야기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드라마’라는 단어는 2000년대 중반까지도 무대 위에 올리는 극(theater drama)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TV에 나오는 극화는 TV show라고 통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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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TV의 중계 쇼와 극화 작품을 예능과 드라마로 구분하지만, 영미권 특히 미국에서는 쇼와 드라마 모두 TV show 하나로 불렀다. 초기 TV 드라마도 극을 중계했기 때문이다.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TV 방송국에서는 “뿌리”(1977), “홀로코스트”(1978), “남과 북”(1985)등의 대규모 미니시리즈를 통해서 TV의 드라마도 영화 같은 감동을 주는 이야기매체로서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으나 단기성 이벤트였을 뿐, 시청자부터 비평가를 거쳐 TV 업계 당사자에 이르기까지 TV의 드라마는 여전히 빈약한 ‘쇼’였다.

 

1980년대까지도 TV 드라마의 정체성은 가끔 영화 비슷한 작품이 나올 뿐 기본적으로 인식은 ‘소프 오페라’, 한국식으로 풀면 ‘막장 드라마’에 머물러 있었다. 1920년대 라디오 드라마에서 유래한 중장년층 대상의 통속극은 보수적인 사고방식과 복잡한 연애관계가 주종이었고, 작품성은 상관 없이 오로지 자극적인 전개방식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거나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TV 드라마의 정체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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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막장 드라마’가 대세를 이루지만, 적어도 TV 드라마 전부가 막장 드라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TV 드라마의 기본은 막장 드라마였고, TV 드라마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의미가 그다지 없다고 방송국도 시청자도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80년대는 그런 TV의 정체성에 반기를 드는 작품이 조금씩 등장한 시기였다. 여러 작품을 한 두 명이 총괄해서 제작지휘하는 TV 드라마의 특성상, 제작총지휘자의 성향에 따라 품질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1960년대 후반에 진 로든버리가 “스타트렉”(1966-1969)을 통해 사회적인 각성을 추구했고, 80년대 리바이벌된 “환상특급”(1985-1989), 영화에서 TV로 진출한 스필버그의 “어메이징 스토리”(1985-1987), 탐정 드라마의 일획을 그은 “블루문 특급”(1985-1989) 등이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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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rkly.com/post/58515/star-treks-uhura-was-convinced-to-stay-on-the-showby-martin-luther-king-jr
1960년대에서 영상작품에서 흑인과 백인이 키스를 하는 것은 금기였다. 이를 공개적으로 누구나 보는 TV에서 타파한 것은 “스타트렉”이었다. 커크와 우후라의 키스에 불경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제작자는 ‘인간이 우주로 나가는 상황에 인종 성별 차별을 왜 하는가?’ 간명히 대답했다.

 

 

1980년대에서 TV에서 깊이 있고 짜임새 있고 복잡한 이야기를 보는 것은 일종의 혁명이자 시청자의 폭을 줄이는 자폭 행위에 가까웠다. TV는 기본적으로 단순하거나(시트콤) 아무런 생각 없이 봐야 하는 자극물(막장 드라마)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등장한 ‘영화에서 일한 제작자가 주도하는 짜임새 있는 작품’의 등장은 1990년대의 복잡한 드라마의 서문을 열어주었다. 바로 “트윈픽스”(1990-1991)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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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2년간 방송되었지만 미국 드라마의 정체성은 이 드라마를 기준점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트윈픽스”는 막장 드라마의 전개법에 복잡한 미스터리를 신비주의로 버무린 괴이한 드라마였다. 이전까지의 드라마 기준이 연령별 성별 구분이 가능했다면 “트윈픽스”는 바로 현재의 기준, ‘취향에 따라 0000를 보는 사람과 안 보는 사람’을 굳건히 했다. 특정 내용을 기획하며 이것은 남자/여자가 더 볼 것이다, 중장년층/청소년층을 공략하는 작품이다 등의 예측이 무력화된 것이다. 괴이한 내용과 FBI라는 기묘한 조합, 매 회 차곡차곡 쌓이는 미스터리, 공포스럽지만 동시에 나른하게 사람을 사로잡는 불확실성의 성공, 이는 “엑스파일”(1993-2002)이라는 ‘초자연현상을 쫓는 수사관’ 드라마가 나올 앞길을 다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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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장 착용증인 요원 역을 해 낸 듀코브니가 폭스 사 사장 눈에 띄는 계기이기도 했다. 참고로 KBS 방송 때도 드니즈 요원 역을 이규화 성우가 했으니 듀코브니와 이규화 커플은 장수할 수 밖에 없다.

 

 

“엑스파일”이 1993년 폭스 TV에 등단했을 때, 이 드라마에 주목점은 내용의 괴이함과 더불어 제작자 크리스 카터가 보여준 ‘영화 같은 품질’이었다. 에미 상 후보로 그래픽 디자인(수상), 주제곡이 올라간 것에서 알 수 있듯, 비평가가 처음에 주목한 것은 내용보다도 만듦새였다. 지금이야 내용이 어두우면 화면도 같이 어두워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TV에서 어두운 화면을 만든다는 것은 시청률 하락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뉴저지의 악마를 추적하는 시즌 1 ‘식인 원시인의 정체’ 편에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밝고 환한 도시가 아니라 필름 느와르에 등장하는 명암대조가 강하고 빛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새로운 밀림이었다. 무언가를 알아 볼 수 있는 화면이 아니라 무언가를 숨기는 화면의 표현이었고, 크리스 카터의 말 대로 ‘깊이 있는 어둠’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정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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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의 해상도와 관용도 문제 등으로 1990년대 TV에서 어둠을 표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1980년대에 나타난 ‘역량 있는 제작총지휘자가 이끄는 팀의 짜임새 있는 이야기’는 1990년대 드라마 상당수에 확대되었다. 딕 울프의 “로 앤 오더”(1990-2010), 스필버그와 마이클 크라이튼이 창안을 한 의학드라마 “er”(1994-2009), 데이비드 E. 켈리의 “앨리 맥빌’(1997-2002), “보스턴 저스티스”(1997-2004) 등은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지상파(네트워크)에서 선사함으로서 시청자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TV에서 애써서 복잡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도 시청자가 알아들을 수 없다는 암묵이 깨진 것이었다.

 

“앨리 맥빌”은 도시에 사는 독신녀를 통해 사회적인 관계와 유대를 맺는 개인의 삶을 탐구했고, “er”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느끼는 감동과 갈등을 세밀하게 묘사했고, “로 앤 오더”는 범죄사건 속에 드러나는 치밀한 인간군상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엑스파일”은 내용의 특성 상 사고의 범주가 남달랐다. 과학과 비과학에 대한 탐구, 초자연을 규정하는 인간의 지성, 권위를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불안심리, 정치권력이 내재화한 사회의 모순 등을 각 에피소드마다 짚어 나갔다. 단독 에피소드가 강화된 이야기 전개법에 따라 각 에피소드는 다양한 주제를 편마다 시청자에게 제시하고 생각하게 요구했다.

 

이런 방식으로 1990년대의 영미권 드라마들은 이전까지는 어렵고 힘들다고 했던 것들을 타파하는데 성공했다. TV의 기술적인 문제로 표현이 힘들다고 했던 고급스러운 화면의 구사, 시청자가 이해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도외시했던 짜임새 있고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주제 구현 등이 여러 미국 드라마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는 “소프라노스”(1999-2007), “섹스 앤 더 시티”(1998-2004) 등 1990년대 후반 케이블 채널 HBO의 적극적인 드라마 제작 후원 아래 더 발전했다. 공화당 정권 하에서 언론회사를 더 살찌우는 목적으로 허가한 자체제작 드라마 허가와 제작비 상승은 때 맞춰서 작품의 질을 끌어올리는데 상승효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시청률이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다던 “엑스파일”이 유달리 여기서 돋보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엑스파일”은 “트윈픽스”에서 하나를 더 받아서 발전시켰다. 바로 ‘헌신적인 시청층’의 발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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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픽스”는 온라인 토론으로 더 활성화되었고, “엑스파일”은 토론 활성화를 넘어 온라인에서 팬이 조직되어 활동하는 현재의 ‘온라인 팬덤 문화’의 초석을 닦았다. 컴퓨터와 해킹 실력으로 멀더를 돕는 ‘론건맨’의 인기가 높은 이유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엑스파일”이 불러온 온라인 팬의 결집과 활동은 전세계적이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팬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나면 비슷한 활동양상을 보였다. 온라인 토론, 정기 채팅방, 실제로 만나는 모임 결성(이른바 번개모임부터 컨벤션까지), 관련 작품 창작(팬픽션, 팬아트), 관련 물품 제작 공구(굿즈) 등이 전세계적으로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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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아니고, 한국의 1990년대 중반에 결성된 PC통신 동호회는 온라인 토론 및 정기채팅은 물론이고, 팬픽션 대회를 열고 물품 공구까지 열심히 다 했다. 1990년대 팬들도 요즘에 하는 하는 것은 다 해 봤으니, 옷장을 뒤져 보자. 부모님이 덕후일 수도 있다.

 

 

제작자 크리스 카터는 “엑스파일”의 팬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지는 않았지만(인턴이 게시글을 모아서 주면 읽는다고 한다) 팬들이 온라인에서 무엇이라고 하는지 늘 정기적으로 점검했고, 이를 반영하지는 않아도(크리스 카터의 고집은 남다르다) 자신이 그 반응을 보고 있음을 드라마 안에서 인용하고는 했다. 유명 유즈넷 사용자 이름인 ‘사색가 thinker’를 해커 이름으로 쓴다던가, 극중에 나오는 명단 등에 팬 이름을 쓴다던가 등이었다.

 

이런 식으로 제작자가 팬에게 ‘당신들의 반응을 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팬덤에게 ‘되먹임(피드백 feedback)’을 준 것이었고, 이는 온라인 팬활동이 자기발생을 한 이후에 성장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반드시 의견반영을 할 필요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팬활동의 대상이 되는 제작자가 팬에게 신뢰를 줄 때 해당 작품이 더 오래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스타트렉”이 1960년대부터 그 신뢰를 바탕으로 TV 스핀오프로, 극장판으로 유지가 되고 있었고, “엑스파일”은 그 활동이 온라인으로 어떤 유형을 보이는지 실례를 제공했다.

 

헌신적인 시청층에게 제작자가 신뢰를 주면서 작품의 생명을 연장하는 현상은 기실 “엑스파일” 만이 아니라 그 시기를 전후해서 온라인 팬이 결성된 작품들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후일 TV 편성전략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다수 시청자를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헌신적인 시청층을 확보할 수 있다면 작품의 상업적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시청률이 낮으면 당연히 취소되는 상황에서 이런 충성 시청자층 발굴은 지역방송연합 드라마나 케이블 자체제작 드라마에서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그 가치를 방송국의 수뇌부에서 인정할 때 뿐이라는 치명적인 단점도 안고 있었다. 2000년대 리얼리티 쇼가 부흥하자 시청률에서 밀린 수많은 극화 작품들 중에서 몇몇 작품은 헌신적인 시청자를 거느렸음에도 시청률과 시청자수가 방송국 수뇌부의 양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기종영을 맞이해야 했다. “엑스파일”은 2000년대 초반에 시리즈가 종영되었고 중간에 극장판2가 나왔지만 작품평가 자체는 시원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를 잃지 않은 팬들은 20주년에 자신들의 헌신에 대한 기대를 코믹콘에서 표현했고, 2016년 그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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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파일” 시즌 10은 1990년대에 “엑스파일”이 보여준 작품성과 혁신에 대한 화답이다. 1990년대 일제히 일어난 TV 드라마의 르네상스 시기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당시 ‘장르물’로서 차별받던 입지를 타파하고 시청자의 조직적인 호응을 이끌고 유지했던 작품의 입지를 10여년 후에 재조명해 보는 작업이다. 1990년대는 어느 한 작품을 짚어서 그 작품만의 공헌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TV 드라마 작품들이 일제히 부흥기를 이끌어낸 일종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였다. 그러다 보니 “엑스파일”이 만든 90년대의 성취를 돌아보는 것은 오로지 “엑스파일”이라는 한 작품만의 공헌이라고 부르기 애매하기도 하고, 지금은 당연한 것을 수선스럽게 추켜 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기에 그때의 감흥과 혁신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되돌아보는 입장의 “엑스파일”은 살짝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낯설어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했던 것의 반복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추억은 추억으로 봉인했어야 하는가 하는 후회도 들기도 한다. “엑스파일”이 낯설어 보인다면 그것은 배우들한테서 보이는 시간의 흐름이고, “엑스파일”이 변한 것 없이 보인다면 그것은 “엑스파일”의 혁신이 지금은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그랬는데, 하는 아쉬움도 기실 “엑스파일”이 1990년대에 10여년 간 쌓은 신뢰의 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