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 [기울어진 극장] 과거와 현재, 사실과 허구의 각색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설명으로 시작하는 작품을 보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일으킨다. 내가 극을 보고 느낀 격렬한 감정이 극작술의 영향인지, 실제라고 믿었기 때문인지 구분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바탕이 된 실화가 사회적인 문제라면 내적 갈등은 더 깊어진다.

 

넷플릭스 드라마 ‘마인드헌터(Mindhunter, 2017~)’는 미국 FBI 요원 존 더글러스의 논픽션 ‘마음의 사냥꾼’(‘마인드헌터’로도 출간)을 원작으로 한다. 동시에 허구를 각색한 작품으로, 실제 사건과 드라마를 위해 만든 설정이 교묘하게 뒤얽혀 있다.

 

 

연쇄살인범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프로파일링(범죄인 인성 분석)이 대중문화의 소재로 이식되면서, 프로파일링을 다루는 작품들은 필연적으로 잔인한 시각적 묘사를 담기 시작했다. 여성 살해와 여성의 신체 훼손을 클리셰로 이용하다 못해 포르노로 이용하는 극단적 경우도 나타났다. 21세기에 1970년대의 이야기를 하는 ‘마인드헌터’ 역시 같은 문제를 안고 출발한다. 남자들만 활동하는 조직이, 여성이 잔혹하게 희생되는 사건을 전문으로 조사하는 이야기를 만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원저자 존 더글러스는 희생자를 모독해서라도 범죄인의 인성을 분석할 기회를 끌어낸 적도 있었다. 이를 그대로 재연하는 데 그친다면, 당시 범죄인들이 말했던 핑계를 반복 재연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실제로 프로파일링을 진두지휘한 로버트 레슬러의 지적대로, 가학적 행동의 원인을 묻는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과 범죄자의 망상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연구하기 위해서이지, 자극성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인드헌터’가 재연 작품이 아니라 아예 허구 작품으로 재창작된 것은, 기존의 연쇄살인 소재 작품이 저지르기 쉬웠던 자극성 추구를 피해 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더글러스의 원작은 수사에 기여한 여성들을 충분히 조명하지 않는다.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책엔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 앤 버제스 박사를 각색한 인물, ‘웬디 카’ 박사는 그 점에서 출중하다. 카 박사는 버제스 박사의 실제 작업들, 즉 범죄 유형 설정의 연구 가능성을 설득하고, 장려금을 직접 얻어내 연구를 지속했으며, 질문서를 작성하고, 설문조사에서 통계수치를 추출하는 기반작업을 한다. 드라마는 그 과정을 쭉 보여준다. 프로파일링하면 언뜻 떠오르는 범죄인의 음험한 독백이 아니라, 그 독백에서 어떤 연구결과를 추출할 수 있었기에 실제 사건 수사에 도움이 됐는지를 보여준다.

 

온전히 허구 인물인 주인공의 여자 친구 데비 미트포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데비는 심리학이 왜 범죄 연구에 중요한지 설명하는 역할을 하며, 1970년대와 21세기 사이의 교량이 된다. 때론 작품 코멘터리를 하는 제작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실존하지 않았던 것을 만드는 것은 조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이 두 여성 캐릭터는 당시에 없었던 현실의 관점을 극에 부여하는 일종의 균형추가 된다.

▲ 홀든 포드에게 데비가 하는 말은 마치 홀든의 또 다른 자아가 프로파일링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데비가 뒤르켐의 ‘일탈낙인이론’을 설명하는 장면은 드라마의 백미로, 이 수사방법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선언한다.

하지만 이는 카 박사와 데비가 극을 이끌어가기보다, 극을 성립하게 하는 기능적 인물임을 의미한다. 특히 데비의 경우 심리학이 왜 범죄수사에 필요한지 시청자를 설득하는 역할이 끝나자 주인공과 과감한 섹스를 하는 장면이 부각된다. “연쇄살인범은 왜 어머니 탓만 하느냐”는 희대의 일침을 놓아도, 일침은 한두 번일 때만 극적 효과가 난다. 그에 비해 범죄자인 에드 켐퍼의 “여자와 소통하는 게 실패할까 봐 여자를 죽여서 소통에 성공했고 그건 엄마가 날 학대해서 그래요”라는 헛소리는 실존 인물의 발언이며 현재도 살짝 변주된 상태로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이 하는 반복된 핑계라는 점에서 무게가 상당하다. 허구인물의 극적 기능으로 나온 대사는 아무리 맞는 말이어도 사라지기 쉽지만, 실존 범죄자의 반복 재생은 계속 존재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굳이 없는 인물을 만든 이유는 현명하다. 해당 사건의 중요성을 작가 혹은 제작자가 얼마나 통찰력 있게 파악했는지 알려주는 거울이다. 이 작품은 영화 ‘세븐’으로 잔혹한 시각적 묘사에 한 획을 그은 데이비드 핀처의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공동제작자 명단을 보면 샤를리즈 테론이 있다. 배우로서 여성의 역할에 다양한 색채를 부여한 것처럼, 제작자로서의 테론이 과거의 기록에 희생자 이외의 여성 역할이 있다고 알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카 박사와 데비는 여자 캐릭터가 없어서 넣은 인물이 아니라 이 드라마가 잔혹성을 소비하지 않고 의미 있게 썼음을 알려주는 지표다. 이 기능을 극을 정립하는 초기 설정으로 쓰고 넘길지, 아니면 극에 녹여서 이후 시즌 전개의 추동체로 만들지는 제작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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