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대학원신문] 발을 땅에 대지 않은 여자, 앨리 맥빌

<앨리의 사랑만들기(Ally McBeal)>는 슬랩스틱 코메디 드라마이다. 몸으로 웃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유치한 상상을 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앨리가 고객을 상대하는데 자신이 없어지자 갑자기 졸아들면서 의자가 커져버린다던가, 잘생긴 의뢰인을 만나자 귀를 도마뱀처럼 씁 핥는다던가. 주인공으로서는 물론이거니와 변호사로서의 품위는 약에 쓸래야 쓸 수 없는, 유치함의 극단을 달린다. 하지만 역으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앨리의 매력이다.

앨리의 매력은 그 나이에도 유치함이나 어린애성이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준 데 있다. 사람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몇살쯤 먹었으면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한다라는 사회적 나이를 지키지 않는다. 먹고사는데 지장 없을 정도로 커리어를 쌓았지만, 한다는 짓이 결국 어떤 남자를 만나서 끝내주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초기에 미국에서 이 칠칠맞은 미니스커트의 변호사에게 페미니즘의 종말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앨리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인 양상이다. 싸워서 얻었으면 쉬어야 한다. 지위를 쟁취했으면 어깨에 힘 빼고 즐길 건 즐기는 것이 정상이다. <앨리의 사랑만들기>에서 앨리 뿐만 아니라 그 옆의 모든 조연들까지 사회적인 규제와 상관없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생을 즐긴다. 그들을 통해서 시청자들은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함정이 존재한다. 괴벽스러움과 유치함 뒤에는 어떠한 도덕적 정당성이나 가치평가가 따라오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 맥주 광고에서 드럼치는 여자가 땀을 닦으며 ‘나는 공주가 아니다’라고 한다. 내숭떨고 앉았네,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땀흘리는 나는 공주가 아니다’라는 발언은 ‘난 공주같이 비리비리한 년이 아니다’라는 비교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남을 깎아먹어 자기를 낮추거나 높이는 것은 자기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괴벽이나 유치함이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것은 내숭이나 위선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특정인의 유치함과 순수함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정신적 테러, 환경재해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슬랩스틱 코메디는 괴짜들을 동원해서 진지해야할 문제를 아예 열외로 만들어버린다. 앨리의 엉뚱함이 오히려 여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회적 갈등 소지를 아예 공중분해시켜 버린다. 슬랩스틱의 세계이니 지상의 법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앨리는 슬랩스틱을 통해 여자들에게 단순한 물리법칙만이 아니라 사회규칙까지도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 자체가 카타르시스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앨리를 탄생시킨 제작자 데이비드 켈리에게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앨리는 슬랩스틱의 발랄함을 주변 캐릭터에게 넘기고 치정극과 정신착란에 얽매인다. 앨리는 형사사건같이 살벌한 ‘진짜 세계’에는 안 나가고 민사사건같이 인간이 있는 세상에 남겠다고 한다. 그냥 피가 무서워서 형사사건을 안 한다면 모를까 민사사건이 낫다고? 인간사야말로 칼보다도 총보다도 더욱 사람을 잔인하게 갈라놓는다. 제작자는 그럴싸하자고 앨리를 인간정리에 대해 모르는 변호사로 만들었고, 그때부터 드라마는 물론 인간 앨리도 겉잡을 수 없이 추락해버렸다. 눈앞의 일을 회피하느라 징징대는 어린애로도 모자라 단지 섹스와 환상에 둘러싸인 귀엽게 미친 여자로.

2002/11
이대 대학원 신문